미움받을 용기

제목:  미움받을 용기
작가: 기시미 이치로
기간: 2015.03.13~2015.03.17
 [usr 4.5]

아들러 심리학에 대해 대화체로 이야기를 풀어나가고 있다.

요즘 나오는 자기 개발서와 비슷한 얘기도 있고 해서 쉽게 읽히는 부분도 있었지만, 내용이 깊어지면 이해되지 않는 부분도 있었다. 시간을 두고 다시 읽어봐야 할 책.

 

 

 

p23
하지만 아들러는 트라우마 이론을 부정하면서 이렇게 말했네. “어떠한 경험도 그 자체는 성공의 원인도 실패의 원인도 아니다. 우리는 경험을 통해서 받은 충격 – 즉 트라우마 -으로 고통 받는 것이 아니라, 경험 안에서 목적에 맞는 수단을 찾아낸다. 경험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경험에 부여한 의미에 따라 자신을 결정하는 것이다” 라고.
– 트라우마란 존재하지 않는다

p23
우리는 과거의 경험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가’에 따라 자신의 삶을 결정한다네. 인생이란 누군가가 정해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선택하는 걸세. 어떻게 사는가도 자기 자신이 선택하는 것이고.
– 트라우마란 존재하지 않는다

p32
다시 아들러가 했던 말을 인용해보지. “중요한 것은 무엇이 주어졌느냐가 아니라 주어진 것을 어떻게 활용하느냐이다.” 자네가 Y나 다른 누군가가 되고 싶은 것은 ‘무엇이 주어졌는가’에만 주목하기 때문일세. 그러지 말고 ‘주어진 것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에 주목하게나
– 당신은 ‘이대로’ 좋습니까?

p38
아니, 자네는 바꾸지 못하는 게 아니야. 인간은 언제든, 어떤 환경에 있든 변할 수 있어. 자네가 변하지 않는 것은, 스스로 ‘변하지 않겠다’고 결심했기 때문이네
– 인간은 끊임없이 ‘변하지 않겠다’고 결심한다

p38
철학자: 조금 불편하고 부자유스럽긴 해도, 지금의 생활양식에 익숙해져서 이대로 변하지 않고 사는 것이 더 편하니까. ‘이대로의 나’로 살아간다면 눈앞에 닥친 일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그리고 그 결과 어떤 일이 일어날지 경험을 통해 추측할 수 있어. 비유하자면 오래 탄 차를 운전하는 상태인 거네. 다소 덜거덕거려도 차의 상태를 고려해가며 몰면 되지. 하지만 새로운 생활양식을 선택하면 새로운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도 모르고, 눈앞의 일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도 몰라. 미래를 예측할 수 없어서 불안한 삶을 살게 되지. 더 힘들고, 더 불행한 삶이 기다리고 있을지 몰라. 즉 인간은 이런저런 불만이 있더라도 ‘이대로의 나’로 사는 편이 편하고, 안심되는 거지.
청년: 변하고는 싶지만 변하는 것이 두렵다?
철학자: 생활양식을 바꾸려고 할 때, 우리는 큰 ‘용기’가 있어야 하네. 변함으로써 생기는 ‘불안’을 선택할 것이냐, 변하지 않아서 따르는 ‘불만’을 선택할 것이냐. 분명 자네는 후자를 선택할 테지.
청년: ……방금 또 ‘용기’라고 하셨습니다.
철학자: 그래. 아들러의 심리학은 용기의 심리학일세. 자네가 불행한 것은 과거의 환경 탓이 아니네. 그렇다고 능력이 부족해서도 아니고. 자네에게는 그저 ‘용기’가 부족한 것뿐이야. 말하자면 ‘행복해질 용기’가 부족한거지.
– 나의 인생은 ‘지금, 여기’에서 결정된다

p41
철학자: 하지만 세계와 자신에 대해 어떤 의미를 부여하느냐(생활양식)에 따라 세계와 관계를 맺는 법, 그리고 행동도 변할 수밖에 없지. 여기서 ‘변할 수밖에 없다’는 점에 주목하길 바라네. 자네는 ‘자네’인 채로 그저 생활양식을 고르기만 하면 되는 걸세. 잔인할지는 모르지만 간단하지.
청년: 그게 아닙니다. 제가 잔인하다고 한 것은 그런 뜻이 아니라고요!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있으면 “트라우마는 존재하지 않아, 환경도 관계없어. 모든 것이 자업자득이고, 네가 불행한 것도 다 네 탓이야”하는 것 같아서 단죄당하는 느낌이라고요!
철학자: 아니, 자네를 탓하는 게 아닐세. 오히려 아들러의 목적론은 “지금까지의 인생에 무슨 일이 있었든지 앞으로의 인생에는 아무런 영향도 없다”라고 말해주는 거지. 인생을 결정하는 것은 ‘지금, 여기’를 사는 자네라고 말일세.
청년: 내 인생은 지금, 여기에서 결정된다?
철학자: 그래, 과거는 존재하지 않으니까.
– 나의 인생은 ‘지금, 여기’에서 결정된다

p51
인정하는 것은 훌륭한 태도일세. 하지만 잊지 말게. 인간관계에서 상처받지 않는 것은 기본적으로 불가능해. 인간관계에 발을 들여놓으면 크든 작든 상처를 받게 되어 있고, 자네 역시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게 되지. 아들러는 말했네. “고민을 없애려면 우주 공간에서 그저 홀로 살아가는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하지.
– 모든 고민은 ‘인간관계에서 비롯된 고민’이다

p63~64
철학자: 열등감 자체를 첨예화시켜 특이한 우월감에 빠지는 패턴이라네. 구체적으로는 ‘불행 자랑’이라고 하지.
청년: 불행 자랑이요?
철학자: 성장 과정에서 자신이 겪은 불행을 마치 뽐내듯 말하는 사람, 타인이 위로하거나 변화를 권하면 “너는 내 심정이 어떤지 몰라” 하면서 도움의 손길을 뿌리치는 사람을 가리킨다네.
청년: 뭐 그런 사람이 있기야 하지만……
철학자: 이런 사람들은 불행한 것을 ‘특별’하다고 여기고, 불행함을 내세워 남보다 위에 서려 하지. 가령 내 키가 작은 것. 이에 대해 마음씨 고운 누군가가 “신경 쓸 필요 없어”, “인간의 가치는 그런 걸로 정해지지 않아”라고 위로했다고 치세. 하지만 여기서 내가 “네가 키 작은 사람의 고민에 대해서 뭘 알아!”라고 받아친다면 이제 누구도 아무 말도 꺼내지 않을 걸세. 주변 사람들은 마치 상처난 부위를 어루만지듯 나를 조심스럽게 – 아니, 신중하게- 대하겠지.

청년: 자신의 열등감을 드러내놓고 마치 무기처럼 휘두느는 거군요?
철학자: 그렇지 불행을 무기로 상대방을 지배하려고 해. 자신이 얼마나 불행하고, 얼마나 괴로운지 알림으로써 주변 사람들-이를테면 가족이나 친구-을 걱정시키고, 그들의 말과 행동을 속박하고 지배하려 들지. 첫날 말했던, 집에 틀어박혀서 지내는 사람들은 곧잘 불행을 무기로 하는 우월감에 빠지네. 아들러가 “오늘날 연약함은 매우 강한 권력을 지닌다”라고 지적했을 정도야.
– 자랑하는 사람은 열등감을 느끼는 사람

p76~77
철학자: 먼저 행동의 목표로는 ‘자립할 것’과 ‘사회와 조화를 이루며 살아갈 것’이라는 두 가지를, 이러한 행동을 뒷받침하는 심리적 목표로는 ‘내게는 능력이 있다’는 의식을 갖는 것과 그로부터 ‘사람들은 내 친구다’라는 의식을 갖는 것을 제시했네요.
– ‘인생의 과제’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p85
청년: 요컨대 ‘무엇이 주어지느냐’가 아니라 ‘주어진 것을 어떻게 활용하느냐’하는 것이로군요

청년: 아들러의 심리학은 ‘용기의 심리학’이며 동시에 ‘사용의 심리학’이다……
– ‘소유의 심리학’에서 ‘사용의 심리학’으로

p94~95
철학자: 유대교 교리를 보면 이런 말이 있네. “내가 나를 위해 내 인생을 살지 않으면, 대체 누가 나를 위해 살아준단 말인가?” 자네는 자네만의 인생을 살고 있어. 누구를 위해 사느냐고 하면 당연히 자네를 위해 살아야겠지. 만약 자네가 자네를 위해 살지 못한다면 대체 누가 자네의 인생을 살아준다는 말인가? 우리는 궁극적으로 ‘나’를 생각하며 사는 거라네.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될 이유가 없지.
– ‘그 사람’의 기대를 만족시키기 위해 살지 말라

p99
자신을 바꿀 수 있는 사람은 자신밖에 없네
– ‘과제를 분리’하라

p100~101
철학자: 아이와의 관계를 고민하는 부모는 대게 ‘아이의 인생은 곧 내 인생’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어. 요컨대 아이의 과제까지도 자신의 과제라고 생각하고 떠안는 걸세. 그렇게 늘 아이만 생각하다가 문득 정신을 차렸을 때에는 인생에서 ‘나’는 사라지고 없지. 하지만 어느 정도 아이의 과제를 떠맡았다고 한들 아니는 독립적인 개인일세. 부모가 바라는 대로 되지 않아. 진학할 학교나 직장, 결혼 상대, 일상의 사소한 언행마저도 부모의 희망대로 움직여주지 않는다네. 당연히 걱정도 되고 개입하고 싶을 때도 있겠지. 하지만 아까도 말했지 않나. “타인은 자네의 기대를 만족시키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다”라고. 설령 내 자식이라도 부모의 기대를 만족시키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란 말일세.
청년: 가족끼리도 선을 그으란 말씀입니까?
철학자: 오히려 거리가 가까운 가족이야말로 더 의식적으로 과제를 분리할 필요가 있네.

철학자: 믿는다는 행위 또한 과제의 분리일세. 알겠나? 상대방을 믿는 것, 이것은 자네의 과제일세. 하지만 자네의 기대와 신뢰를 받은 상대가 어떻게 행동하느냐 하는 것은 그 사람의 과제인 걸세. 그 선을 긋지 않은 채 자신의 희망만 밀어붙이면 그건 스토커나 다름없지. 그것이야말고 하지 말아야 할 ‘개입’이라네. 비록 상대방이 내 희망대로 움직여주지 않는다 하더라도 계속 믿을 수 있을까, 사랑할 수 있을까. 아들러가 말하는 ‘사랑의 과제’에는 그런 질문까지 포함되어 있다네.
– 타인의 과제를 버리라

p104
인간은 모두 인간관계로 고민하고 괴로워하네. 이를테면 부모님과 형제의 관계일 수도 있고, 직장동료와의 관계일 수도 있지. 그리고 지난번에 자네가 말했지? 더 구체적인 방법이 필요하다고. 내 제안은 이렇네. 먼저 ‘이것은 누구의 과제인가’를 생각하게. 그리고 과제를 분리하게. 어디까지가 내 과제이고, 어디서부터가 타인의 과제인가. 냉정하게 선을 긋는 걸세. 그리고 누구도 내 과제에 개입시키지 말고, 나도 타인의 과제에 개입하지 않는다. 이것이야말로 구체적이고도 대인관계의 고민을 단숨에 해결할 수 있는, 아들러 심리학만의 획기적인 점이라고 할 수 있지.
– 인간관계의 고민을 단숨에 해결하는 방법

p109~110
철학자: 요컨대 자네는 어느 정도는 개입이 필요하다, 내 길을 타인이 결정해줬으면 좋겠다, 이말인가?
청년: 어쩌면요. 이런 겁니다. 타인이 내게 무엇을 기대하는지, 내게 어떤 역할을 바라는지 판단하는 것은 그렇게 어렵지 않습니다. 반면 내가 하고 싶은대로 사는 것은 굉장히 어려워요. 나는 무엇을 하고 싶은가, 무엇이 되고 싶고 어떤 인생을 살고 싶은가. 그런 구체적인 그림이 떠오르지 않으니까요. 누구나 명확한 꿈이나 목표를 갖고 있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입니다. 선생님은 잘 모르시겠지만.
철학자: 자네 말대로 타인의 기대를 충족시키며 사는 것은 어렵지 않네. 내 인생을 타인에게 맡기면 되니까. 가령 부모가 깔아놓은 레일 위를 달린다, 여기에는 다소 불만을 느낄지언정 길을 헤맬 일은 없지. 하지만 내 갈 길을 스스로 결정하려고 들면 어떨까? 당연히 이리저리 헤매게 되겠지. ‘어떻게 살아야 할까?’라는 현실의 벽에 부딪히게 돼.

철학자:… 타인의 기대를 충족시키고 살면, 그리고 내 인생을 타인에게 맡기면, 자신에게 뿐 아니라 주변 사람들에게도 계속 거짓말을 하게 되는 삶을 살게 된다는 걸.
– 인정욕구는 부자유를 강요한다

p112
청년: 경향성이요?
철학자: 그래. 본능적인 욕망, 충동적인 욕망이라는 뜻일세. 그러면 그런 경향성에 이끌린 채, 다시 말해 욕망이나 충동에 이끌려 사는 것, 비탈길을 굴러 내려가는 돌멩이처럼 사는 것이 ‘자유’일까? 그렇지 않지. 그런 삶은 욕망과 충동의 노예가 될 뿐이라네. 진정한 자유란 굴러 내려가는 자신을 아래에서 밀어 올려주는 태도가 아닐까?

철학자: 단적으로 말해 “자유란 타인에게 미움을 받는 것”일세.
– 진정한 자유란 무엇인가

p126
몇 번이나 말했지만 아들러 심리학에서는 ‘모든 고민은 인간관계에서 비롯된 고민이다’라고 한다네. 불행의 근원은 인간관계에 있다. 거꾸로 말하면 행복의 원천 또한 인간관계에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거야.
– 인간관계의 목표는 ‘공동체 감각’을 향한 것

p138
철학자: 아들러 심리학에서는 온갖 ‘수직관계’를 반대하고 모든 인간관계를 ‘수평관계’로 만들자고 주장하네.

철학자: 그렇지. 대등은 곧 ‘수평’이네. 여기 전업주부인 아내에게 “한 푼도 못버는 주제에!”라고 하거나 “누구 덕에 먹고 사는지 알아!”라며 걸핏하면 큰소리치는 남자가 있네. “돈 걱정을 해봤어, 뭘 해봤어? 그만하면 호강이지 뭐가 불만이야!”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하지. 참 한심하지 않은가? 경제 사정은 인간의 가치와 무관하네. 회사원과 전업주부는 일하는 장소와 역할만 다를 뿐이지. 그야말로 ‘같지는 않지만 대등’한 관계라네.
청년: 그건 그렇습니다.
철학자: 아마 그런 사람들은 여성이 똑똑해지는 것, 자기보다 돈을 더 많이 버는 것, 당당히 자기 의견을 내세우는 것이 두려울걸. 전반적인 인간관계를 ‘수직관계’로 보고, 여자들이 자기를 아래로 볼까 두려워하고 있는 거지. 즉 강한 열등감을 숨기고 있는 거라네.
– 칭찬도 하지 말고, 야단도 치지 말라

p158~159
그래. 둘 사이에는 명확한 차이가 있지. 자기긍정이란 하지도 못하면서 “나는 할 수 있다.”, “나는 강하다”라고 스스로 주문을 거는 걸세. 이는 자신에게 거짓말을 하는 삶의 방식으로 자칫 우월 콤플렉스에 빠질 수 있지. 한편 자기 수용이란 ‘하지 못하는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할 수 있을 때까지 앞으로 나아가는 걸세. 자신을 속이는 일은 없지. 더 쉽게 설명하자면, 60점짜리 자신에게 “이번에는 운이 나빴던 것뿐이야. 진정한 나는 100점짜리야”라는 말을 들려주는 것이 자기긍정이라네. 반면에 60점짜리 자신을 그대로 60점으로 받아들이고, “100점에 가까워지려면 어떻게 해야 좋을까”라고 방법을 찾는 것이 자기수용일세

과제를 분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변할 수 있는 것’과 ‘변할 수 없는 것’을 구분해야 하네. 우리는 ‘태어나면서 주어진 것’에 대해서는 바꿀 수가 없어. 하지만 ‘주어진 것을 이용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내 힘으로 바꿀 수가 있네. 따라서 ‘바꿀 수 없는 것’에 주목하지 말고, ‘바꿀 수 있는 것’에 주목하란 말이지. 내가 말하는 자기수용이란 이런 거네.
– 자기긍정이 아니 자기수용을 하라

p163
자네는 지금 ‘배신당한 상황’에만 사로잡혀 있어. 그럴 때 받을 상처에만 주목하고 있다고. 그런데 신뢰하는 것을 두려워하면 결국은 누구와도 깊은 관계를 맺을 수 없다네.
– 신용과 신뢰는 어떻게 다른가

p190
인생 최대의 거짓말, 그것은 ‘지금, 여기’를 살지 않는 것이라네. 과거를 보고, 미래를 보고, 인생 전체에 흐릿한 빛을 비추면서 뭔가를 본 것 같은 착각에 빠져 있는 거지. 자네는 지금까지 ‘지금, 여기’를 외면하고 있지도 않은 과거와 미래에만 빛을 비춰왔어. 자신의 인생에 더없이 소중한 찰나에 엄청난 거짓말을 했던거야.
– 인생 최대의 거짓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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