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F/B1 일층 지하 일층

제목: 1F/B1 일층 지하 일층
작가: 김중혁
기간: 2014.07.01~2014.07.08
 [usr 3]

빨간 책방 김중혁 작가의 단편집.

도시를 배경으로 한 SF적인 느낌의 소설 모음.

 

 

지윤서는 출장에서 돌아와 짐도 제대로 풀지 않고 불을 켜둔채 잠이 들었다. 내리 열 시간을 자고 새벽에 잠이 깼을 때 형광등이 유난히 환했다. 지윤서는 형광등 속을 들여다보았다. 너무 밝아서 안에 뭐가 들어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눈을 감았다가 떴더니 형광등 속에서 뭔가 팔딱거리며 뛰어다니고 있었다. 빛의 그림자일 것이다. 지윤서는 눈을 감고 움직이지 않았다. 움직이지 않으니 감각이 둔해졌다. 손끝을 까딱해보았다. 움직였다. 십 분쯤 감각이 없는 사람처럼 누워 있었다. 잠에서 깨어나는 게 이런 것이었지. 모든 감각이 천천히 현실로 돌아오는 거였지. 참 오랜만에 느껴보는 감각이었다. 혼자라는 게 실감이 났다. 맞아. 혼자라는 사실을 한참 잊고 있었네. 결국 혼자일 걸 알고 있었잖아. 예전부터 넌 알고 있었어. 결국 과정은 중요한 게 아니었어. 혼자였고 혼자이고 앞으로 혼자일 거야. 지윤서는 가슴에서 뭔가 울컥하는 감정을 느꼈다. 그 감정이 터지도록 내버려두는 게 좋을지 꾹꾹 눌러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울고 싶지 않았다. 울고 나면 기분이 좋아질 걸 알고 있었지만, 버릇처럼 울고 싶지는 않았다.
– 바질
P.98 ~ 99

 
작은 마술쇼에서 나는 많은 것들을 사라지게 했고, 다시 나타나게 했으며, 어떤 것들은 찢었다가 다시 붙였다. 모두 불가능한 일이다. 소멸된 것들은 되살아날 수 없으며 찢어진 것들은 절대 다시 붙지 않는다는 걸 모두 안다. 관객들은 알면서도 매번 속아준다. 불가능을 가능하게 하는 마술이 나를 사로잡았다. 내가 가능하게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던 때였다. 아무리 열심히 노력해도 해결할 수 없는 일들이 도처에 있었다. 어머니는 육 개월째 병원에 계셨고, 처가에서 하던 사업은 부도를 맞았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열심히 돈을 버는 것뿐인데, 그것도 만만치 않았다. 마술의 세계만이 만만했다. 마술은 관객과 함께 가능성을 공모하는 것이어서, 불가능한 일이 실제로 일어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의 조짐을 서로 인정해주기만 하면 되었다. 한번 그 공모에 맛을 들이자 빠져나오기 힘들었다.
– 크라샤
P.244

 
가을에는 마술쇼와 함께 운조빌딩이 사라지는 걸 봤고, 겨울에는 끝내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한 해가 끝났다는 기분이 들었다. 다음해 봄이 시작되면 어머니가 다시 살아나서 새로운 한 해를 시작할 것 같았다. 다시 죽어서 다시 태어나고, 매년 그렇게 한 해를 보낼 것 같았다. 그러나 나는 분명히 안다. 소멸된 것들은 되살아날 수 없다. 그리고 찢어진 것들은 절대 다시 붙지 않는다. 나는 삶과 마술을 때때로 바뿌고 싶어진다. 화장지가 붙는 대신 어머니가 되살아나는 장면을, 꿈꾼다. 그러나 그렇게 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안다.
크라샤. 나는 그 시절을 회상할 때 단 하나의 단어로 모든 걸 되살린다. 크라샤. 그 단어의 의미는 한참 후에 알았다. 영어 단어 ‘crusher’의 발음을 옮겨적은 것이었고, 모든 걸 잘게 부수는 기계의 이름이었다. 크라샤. 그 단어는 주문처럼 순식간에 모든 기억을 되살린다. 분쇄된 가루는 최후의 이름들이다.
– 크라샤
P.2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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